생성형 AI의 대명사 챗GPT의 성장세가 매섭다. 시장조사업체 컴스코어(Comscore)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챗GPT의 미국 내 월간 활성 사용자 수는 7,290만 명으로 전년 동기(4,150만 명) 대비 무려 76%나 폭증했다. 불과 12개월 만에 관객을 두 배 가까이 불린 셈이다. 대중의 인식도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다. 칸타(Kantar) 조사 결과 소비자의 68%가 생성형 AI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맥킨지(McKinsey)는 미국 성인의 절반 이상이 AI 검색을 통해 가전제품 등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바야흐로 일상 속 AI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거대언어모델(LLM)의 급부상은 기존 번역 업계에 커다란 위협이자 과제가 되었다. 2023년, 독일의 번역 스타트업 딥엘(DeepL)이 한국에 처음 상륙했을 때만 해도 언론들은 앞다퉈 ‘혜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네이버 파파고나 구글 번역기를 뛰어넘는 매끄러운 문맥 처리 능력 덕분에 직장인과 연구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불과 2년 만에 크게 뒤집혔다. 챗GPT를 비롯한 대부분의 생성형 AI가 자연스러운 번역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게 되면서다. 심지어 애플은 실시간 통번역 기능을 내장한 에어팟까지 내놓았다. 더 이상 ‘뛰어난 번역 품질’ 하나만으로는 업계 선두를 지킬 수 없는 혹독한 생존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캐주얼은 챗GPT, 비즈니스는 딥엘”
최근 신규 서비스 ‘딥엘 보이스’와 ‘딥엘 에이전트’를 소개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야렉 쿠틸로브스키 딥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달라진 시장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범용 모델과 전문 번역 솔루션의 쓰임새가 철저히 나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가벼운 뉴스 기사를 읽거나 일상적인 이메일을 번역할 때는 챗GPT와 같은 범용 모델이 주로 쓰인다. 그러나 방대한 분량의 계약서를 검토하거나 브랜드의 미묘한 뉘앙스를 유지해야 할 때, 혹은 엄격한 규제 준수가 필요한 기업 환경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쿠틸로브스키 CEO는 기업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정확성, 통제력, 그리고 보안’을 꼽았다. 딥엘이 여전히 글로벌 B2B(기업 간 거래) 시장에서 탄탄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딥엘은 인터넷상의 무분별한 데이터를 긁어모아 학습하는 범용 AI와 궤를 달리한다. 언어 처리에 특화된 자체 AI 아키텍처를 구축해 치명적인 오역이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의 위험을 최소화했다. 여기에 수천 명의 언어 전문가가 결과물을 직접 검토하고 교정하는 ‘휴먼 튜터링’ 시스템을 결합해 정밀도를 끌어올렸다. 실제로 지난해 실시된 전문가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딥엘의 번역본은 GPT-4나 구글 번역기에 비해 수정이 필요한 빈도가 2~3배가량 적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 보안 정책을 앞세운 덕분에 딥엘의 기업 가치는 지난해 5월 20억 달러에서 올해 10월 약 50억 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음성 통역과 자율 에이전트로 진화하는 번역
방한 기자간담회에서 딥엘은 텍스트를 넘어선 새로운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실시간 음성 번역 솔루션인 ‘딥엘 보이스’가 대표적이다. 이미 작년 11월 글로벌 출시에 맞춰 팀즈나 줌 등 주요 화상 회의 플랫폼과 연동을 마쳤고, 짧은 기간 동안 300만 분 이상의 회의를 번역해 냈다. 한국어를 포함한 16개 언어의 음성을 인식해 35개 언어의 자막으로 실시간 변환해 준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제된 글과 전혀 다르다. 발음이 뭉개지거나 배경 소음이 섞이기도 하고, 문장 구조가 중간에 뒤틀리는 일도 허다하다. 쿠틸로브스키 CEO는 이 점에 착안해 “사용자가 실제로 내뱉은 말보다 훨씬 읽기 편한 형태의 문장으로 다듬어 보여주는 데 기술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이 솔루션은 현재 도요타 방직, 일본 NEC 등 굵직한 다국적 기업들의 글로벌 협업 인프라로 활발히 쓰이고 있다.
함께 공개된 ‘딥엘 에이전트’는 단순 번역을 넘어 인간의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자율형 AI다. 사용자를 대신해 화면을 스크롤하고 버튼을 클릭하며, 데이터를 입력하거나 복잡한 문서를 직접 처리한다. 기존 소프트웨어에 AI 스킨만 덧씌운 형태가 아니라, 철저하게 비즈니스 환경의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됐다.
대체재가 아닌 조력자, 인간 통역사의 딜레마
흥미롭게도 AI 번역 기술의 최전선에 선 딥엘의 인터뷰 현장에는 전문 인간 통역사가 배석했다. 자체 통역 솔루션인 딥엘 보이스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심도 깊은 문답이 오가는 현장의 미묘한 뉘앙스를 완벽하게 담아내기엔 인간의 세밀한 조율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AI 발전으로 가장 먼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직업 1순위로 늘 통번역사가 꼽힌다. 그러나 쿠틸로브스키 CEO의 시각은 달랐다. AI가 업계의 지형도를 크게 뒤흔들고 수많은 직업의 형태를 바꾸겠지만, 결코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그는 오히려 역할의 진화에 주목하며, 오직 인간만이 창출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의 영역은 앞으로도 굳건히 존재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도화된 생성형 AI의 파상 공세 속에서도 딥엘이 자신들만의 독보적인 생존 방식을 묵묵히 증명해 나가고 있다.